한북정맥,제6구간 (47번 국도~수원산~큰넓고개까지)
...............언 제 ; 2012년 11월 3일 (7~16도, 맑음) ...............누구와 : 박종관, 부길만, 이병덕, 이정일, 유광종, 전형기, 조은상, 주성필, 천승배 (이상 9명) ...............산행시간 ; 5시간 40분 ...............휴식, 식사 ; 시간 분
09;35 47번 국도, 고개 마루 출발 09;52 능선 분기점/좌 10;47~1055 명덕 삼거리 11;37~11;43 수원산 정상 군부대 앞 12;00 705봉 12;28~12;55 점심 13;15 좌 송전탑 13;22 송전탑(59번)/암봉 13;25 송전탑(58번)/전망 좋음 13;36 송전탑(57번) 13;43 송전탑(56번) 13;45~13;54 폐 헬기장/갈대밭 사진 13;55~14;05 국사봉 14;25~14;42 이정표(국사봉 1.26km, 87번 국도 0.88km) 14;45 채석장 철조망 14;55~15;00 육사생도 참전비 15;10 큰넓고개 도착 <17;30~19;00> 구리 수산시장에서 만찬(방어, 전어, 낙지 회)
서울의 어제 아침 기온이 올 해들어 가장 낮은 2~4도 정도의 날씨이고, 오늘도 오후부터 기온이 점차 올라 14~16도에 접근하여 예년 날씨를 되찾는 단다. 아침 8시 20분에 포천에 도착하여 ‘복지 순두부 집’에서 식사를 하고, 군부대 앞을 지나 47번 국도의 서쪽 언덕 위에 있는 출발지점에 오르니 9시 25분이다.
불과 한 달 전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썰렁하다. 얇은 외투를 한 두 겹을 더 걸치고 9시 35분에 한북정맥 제6구간을 출발하는데, 발아래는 벌써 낙엽이 떨어져 우수수 밟힌다. 대자연의 변화는 삼라만상을 어느덧 붉게 물들이고, 이것도 모자라 인간의 마음조차 정처 없게 유혹한다.
오늘 코스는 비교적으로 600~700m의 얕은 산이지만 군부대가 많은 구간으로 예상하고 출발하였는데, 실제로 10분도 되지 않아 군부대 정문 앞을 지나 철조망 옆을 따른다. 철조망이 끝나는 지점이 능선 분기점으로서 다시 정맥 길은 좌측으로 꺾어지며 남쪽으로 향한다. 따사한 햇살이 반짝거리는 초가을 날씨에 그만그만한 능선을 두 어 봉지나 숲속을 빠져나오니 명덕삼거리이다.
직진하여 마을을 향하는 좁은 도로까지 치면 사거리인 샘이다. 우측 수원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간단하게 못을 축이는데, 왼쪽 아래 축산 농가에서 묻어나오는 냄새가 역겹다. 여기서 40분 정도 울창한 솔숲 길을 따라 올려친다. 그렇게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수원산 정상으로 향한다.
709.7m의 수원산은 포천의 진산을 이루면서 절경을 자랑한다. 예로부터 이 산은 계곡이 깊고 산림이 울창하여 여름철에도 빙설이 남는다고도 전해지는 산이다. 또한 수원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산허리를 울리고 나면, 물안개가 구름같이 피어오르기도 한단다. 水源山이라고도 하며, 또 어떤 기록에는 受原山이라고도 적혔다. 그러나 지금 정상은 군부대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나, 군부대 남쪽 입구 바위 돌에 앉아 보면 그 절경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왜 水源山이란 이름이었을까 궁금하여 문서를 들쳐보니 이곳 수원산에서 발원하는 물이 王宿川을 이루는데, 이 王宿은 조선 태조 이성계에 관한 역사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왕숙천이 흐르는 남양주시 진접읍에 가면 八夜里라는 동네가 있고, 이곳이 원래는 ‘여덟밤이’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는 크게 상심하여 1402년에 함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아들 태종(이방원)이 왕위에 올라 신하들을 함흥으로 보내 부왕이신 태조 이성계를 한양 궁궐로 돌아오시기를 여러 차례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이태조는 태종의 명을 받고 함흥까지 내려온 신하들을 모조리 죽인다. 이렇게 하여 돌아오지 않는 신하를 `咸興差使`라 부른다.
부왕 이태조는 끈질긴 이방원 권유에 결국은 마지못하여 한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바로 한양으로 들지 않고 이곳에서 여덟밤을 잤는데, 왕이 잤다고 王宿이고 8일을 잤다고 八夜里이다. 수원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노라니 마치 수년전에 종편된 역사 드라마에서 이태조의 어가(御駕)행렬을 보는듯한 착각을 한다
705m의 봉을 지나니 좌측으로 빽빽이 들어선 잣나무 숲이 하늘을 찌른다. 반은 양지와 음지가 교차되는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은 특히 전형기 님이 특별히 주문한 김밥이라는데, 김밥 한 줄이 커서 식성이 좋아야 다 먹을 수 있을 정도이고, 맛도 좋다.
좌측 아래로 47번 국도가 남북으로 뻗어있고, 올망졸망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겹쳐진 산야를 바라보며 송전탑 5~6개를 지난다. 국사봉을 앞에 두고 폐 헬기장에 억새가 만발하여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른다. 뭉게구름이 한가롭게 떠돌고 단풍이 더욱 짙어진 오후 2시에 국사봉에 닿는다.
여기서 길은 우측으로 틀어 내려가는데 한참을 가도 시그널이 없다. 이상하다. 길을 잘못 들은 것도 아닌듯한데, 이렇게 리본조차 없다니, 20분 이상은 걸었을까, 마침내 이정표가 나타난다.
좌측으로 굴착기 소리가 요란하다. 채석장이다. 몇 년을 파냈는지 산 하나쯤은 충분이 없어진 듯 패여 있고, 10여대의 덤프트럭과 분쇄기, 굴착기 소리가 요란하다. 얼른 이곳을 빠져 나오니 은행잎이 노란 길섶에 ‘육사생도 참전비’를 맞게 된다.
6.25 30주년을 맞아 세운 이 기념비는 당시 육사생도 1.2기생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북한군이 남침하자 소위 임관 2주를 앞둔 1기생 263명과 입교 25일밖에 되지 않은 2기생 334명 등 총 597명은 임관 절차도 거칠 여유 없이 이곳 전선에 투입되어 이중 150여명이 넋을 잃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용사들의 명복을 기원하며, 건너편 큰넓고개 변에 있는 주유소에 도착하니 오후 3시 10분. 운전기사가 준비해 온 포천 이동막걸리 2병을 비우고, 구리 수산시장으로 달린다. 요즘은 방어와 전어가 제철이라는데 전권을 유광종, 주성필 님께 넘긴다. 이 두 대원의 입담과 방어회, 전어구이, 매운탕이 함께 어우러진 만찬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