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제5회 낙동정맥 제9구간 (백암산입구~백암산정상~백암산갈림길~윗/아랫삼승령까지)

2015.02.16 Views 105 산누리

(남부터미널~소수서원~영양 기산리, 온다네농장) <첫째 날> 이번 낙동정맥 코스는 첫째 날의 하산지점인 ‘아랫삼승령’에 도착해서 출발지점인 白巖山 입구까지 다시 차량을 가지러 오려면 1시간 30분이나 걸린다. 왕복 3시간이나 도로위에서 허비해야 되는 조건이다. 또 겨울날씨가 일찍 어둡고, 그곳의 도로 여건이 좋지 않은 점을 감안한다면 여러 가지 무리가 될 것 같아 고민이다. 몇몇 대원들에게 이와 같은 사정을 설명하니 異口同聲으로 무리할 필요 없다며 산행은 그 이튼 날로 하고 첫 날은 여유롭게 文化探訪이나 하잖다. 따라서 오늘은 일단 11시에 서울을 출발하고 본다. 그리고는 문화 탐방으로 일찌감치 점찍어 놓았던 ‘소수서원’에다 내비게이션을 맞춘다. 오전 11시란 널럴한 시간대에 막상 남부터미널을 출발을 하고 보니 곳곳에 도로가 停滯되어 後悔莫甚이다. 11시 출발이 마땅한 시간대가 아니구나 하는 마음 다 잡아 먹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11시 30분에 약속해 놓았던 ‘하남 만남의 광장’엘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도착하여 두 대원과 합류한다. 잠시 정상 속도를 내는가 싶던 중부고속도로도는 영동고속도로와 연결하는 호법인터체인지에 들어서니 차량들 거의가 올 스톱 수준이다. 겨우겨우 거북이 차량 행렬 틈에 끼어 답답한 운행을 이어 가다가, 여주IC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빠져나오고서야 제대로 속력을 내어 본다. 감곡IC를 거쳐 오후 1시 15분에 겨우 단양휴게소에 들어선다. 점심을 마치고 나니 오후 1시 50분, 단양휴게소에서부터의 차량운전은 찬박사가 자청한다. 확실히 운전이 부드럽고 안정성 있어 물어보니 어제오늘 숙련된 것이 아니고 10여 년간이나 SUV차량 운전의 노하우란다. 오후 2시 45분, 소수서원이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하여 문화해설사 李容極 님을 초대하여 전반적인 설명을 듣기로 한다. 원래 소수서원 자리는 성리학의 선구자인 안향(安珦)선생이 공부하던 절이다. 지금의 소수서원은 1541년(중종 36) 7월,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곳 출신인 유학자 安珦을 배향하기 위하여 중국의 白鹿洞書院을 본떠 세운 사묘(祠廟)이다. 원래는 白雲洞書院이라고 하다가 紹修書院이란 현판은 1550년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에 임금님께 진언을 올려 하사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賜額書院이다. 旣廢之學紹而修之에서 따온 紹修는 ‘이미 학문이 피폐해 진 것을 더 늦기 전에 이어서 학문을 닦을 수 있게 한다.’라는 의미이다. 순흥에 유배되었던 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이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 되었을 때 이곳 順興邑(지금의 풍기)이 쑥대밭이 되고 順興 鄕校도 閉鎖되어 학문조차 이어가지 못하고 단절될 위기였다. 이때 뜻있는 유림들이 상소를 자청하고 서원을 복위하여 학문만큼은 대를 잇게 한다는 의미의 紹修이다. 그 후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유림이 4300여명이나 배출되었다니 역시 우리나라 최초 최고의 서원으로 불리나보다. 賜額書院이 되면 임금이 책이나 논밭, 노비를 내려 보내고 면세와 면역의 특전까지 주는 서원이다. <참조 ; 좀 더 자세하고 재미있는 설명은 만만교수의 ‘소수서원 탐방기’가 대신한다.> 문화해설사 이용극 님의 거침없는 해설에 박수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그의 본관을 물어보니 역시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서 자긍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다. 소수서원 입구의 죽계천 변에는 경렴정(景濂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그 건너편 바위에는 ‘白雲洞’이란 흰 글씨와 붉은 칠을 한 ‘敬’자가 있는데, ‘白雲洞’이야 이곳의 지명이려니 하지만 ‘敬’자는 무슨 의미일까? ‘敬以直內 義以方外’에서 온 ‘敬’이다. 곧 ‘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곳에 드나드는 이들이 늘 이 글자를 보면서 ‘행동을 바로 잡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 질 때마다 이야기는 더욱 부풀려지고 재미있게 꾸며진다. 원래 이 자리에는 ‘宿水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세조 3년 정축지변(단종 복위거사)때 廢刹되고 佛像들을 모두 죽계천에 버렸더니 매일 밤마다 귀신들의 울음으로 사람이 거처하기가 힘들게 된다. 이 때 퇴계 이황이 ‘敬’자를 새겨서 공경하는 뜻을 나타냈더니 그제 서야 울음소리(怨聲)가 그쳤다는 얘기이다. 또 한편으론 단종 복위운동 때 죽어간 수많은 선비들의 피가 죽계천 물을 붉게 물들이고, 그 핏물은 수십리까지 흘렀으니 그 원귀들의 통곡소리가 오죽하랴. 그 혼백을 달래려기 위한 방편으로 ‘敬’자를 새겼다는 얘기도 함께 전해지고 있으나, 판단은 본인이 해야 할 것 같다. 유창한 이용극 해설사의 입담에 홀려 정신없이 듣다보니 오후 4시가 된다. 소수서원에서 영양군 기산리의 민박집 숙소까지는 두 시간 가까이 예상한다. 오후 4시에 소수서원을 출발한 차량은 5시 50분에 기산리 316번지에 있는 민박에 도착한다. 꼬불꼬불한 외길 비포장도로를 간신히 오를 때는 이런 깡촌에 동네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이더니 민박집에 막상 도착하고 보니 평지에 서 너 집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벽촌마을이다. 주인은 50대 초반의 핸섬한 김병찬 씨이고, 방바닥엔 도착 하자마자 식사를 할 수 있게 토종닭 백숙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산나물 체험관도 함께 운영하고 있는 김사장은 붙임성도 있고 농촌에 사는 보람과 긍지도 함께 하는 분 같다. 방목한 토종닭 요리여서 그런지 육질이 쫀득쫀득하고 단단하다. 여기에 무말랭이 반찬에 명이나물과 각종 산나물 절임으로 식사를 한다. 이어 주인장은 돌배 담금 술을 한 병 내어 놓으며 한잔씩 권한다. 독주에 담근 독특한 돌배 향이 입 안에 감치고 방바닥의 온기가 따뜻하게 퍼지면서 산촌의 밤도 점점 깊어간다. //////////////////////////////////////////////////////////////////////////////////////////////////////////////// <둘째 날> ; 제9구간 (백암산 입구~백암산 정상~백암산 갈림길~매봉산~윗삼승령~아랫삼승령까지) ...............언 제 ; 2015년 1월 18일 (-7도, 맑음) ...............누구와 : 박종관, 박찬익, 부길만, 이정일, 황성자, @구본영 ...............산행시간 ; 총 6시간 40분 ...............(정맥 산행 4시간+백암산 입구에서 백암산 갈림길까지 2시간 40분) ...............휴식, 식사 ; 포함 06;00 온다네 농장 출발 07;18 백암산 입구 도착 ........................................................ 07;20 백암산 입구 초소 출발 07;43 삼거리/백암폭포 쪽(좌) 08;07~08;10 백암폭포 앞 08;23 금령 김씨 묘 08;25 새터바위 08;58~09;00 백암산성(삼거리)/정상 1.1km 09;32~09;35 백암산 정상/정상석/경관 좋음 09;49~10;00 백암산 갈림길/낙동정맥길 복귀 ...................................................... 10;00 백암산 갈림길 출발 10;25~10;29 임도/낙동정맥 트레킹 종합안내도 11;20 953봉/준.희 팻말 11;50~12;20 매봉산(921m)/폐헬기장/서래야 팻말/점심 12;41~12;44 임도/윗삼승령/좌측 차단기 13;15~13;20 삼승령/삼각점/칠보지맥 분기점 14;00 임도/아랫삼승령/정자 .......................................................... 14;30~14;50 저시 마을회관 15;20~15;30 온다네 민박 도착 16;00~16;20 영양읍 재래시장 탐방 16;50~17;50 김정순 명인의 집(잉어찜) 18;00 서 안동IC출발 20;40 서울 남부터미널 도착/해산 <산행기> 이곳 민박집 ‘온다네 농장’은 숙박은 허가 받았으나 요식 허가는 받지 않았단다. 때문에 식사는 해 줄 수가 없고 손객 스스로 해결해야 된다기에 비아는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한다. 그러면서 엊저녁 밥과 반찬이 넉넉한 것은 이러한 주인장 아줌마의 속 깊은 배려였을까.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닭백숙을 찌지고 볶고 데워서 밥을 말고, 산나물 반찬으로 아침 끼니를 해결하고 나니 6시이다. 오늘 차량 운전은 민박집 주인 김사장에게 부탁한다. 김병찬 사장은 군대 생활을 운전병으로 제대했다며 본인 차량은 아니지만 운전 실력만큼은 염려 말란다. 특히 넓은 고속도로보다는 산중 오지도로가 더 익숙하다면서 우리들을 안심시킨다. 꼬불꼬불하고 울퉁불퉁한 도로는 개천을 따르고, 개천은 억새와 맑은 물결을 따라 절경 암반을 휘감아 골짜기를 빠져 나간다. 이 골짜기의 억새가 암벽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김사장은 억새가 달갑지 않다. 더구나 억새 때문에 동네 망친다며 행정 당국을 원망하기도 한다. 억새가 무성한 곳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하고, 이런 농촌에는 외지인들을 많이 올 리가 없단다. 시골에 오면 물고기도 잡고 옛 추억거리를 만들어 줘야 도시인들이 많이 오는데, 그렇다고 억새를 캐어내면 당국에 고발되어 함부로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현실이란다. 캄캄한 기산리 민박집 온다네 농장을 출발하여 首比를 거치고 劍摩山 自然休養林 입구를 지난 뒤 다시 九珠嶺을 넘는데 동해바다에서 日出의 용트림이 시작된다. 해발 600m가 넘는 구주령을 어떤 이는 한국의 ‘차마고도’라고까지 표현하며 극찬하는 곳이다. 九珠는 구슬을 9개나 꿰어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고개이다. 이런 곳에서 동해바다위에 장엄하게 펼쳐지는 일출의 기운을 더하니 가슴이 벅차다. 많은 사람들은 이 고개 이름을 ‘구실령’이라 불렀고, 가끔 ‘구지재’, 또는 ‘도부재’라고도 불렀던 이름인데 근래에 와서 굳이 ‘구주령’이란 한자식 이름으로 고쳐 사용하고 있다. ‘구실’은 ‘구슬’의 경상도 사투리이다. 이 고개의 옥녀당에는 애틋한 옥녀의 사연이 전해지기도 한다. 조선 인조 때 영해(지금의 영양)부사로 있던 황씨의 예쁜 딸 옥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해부사 황씨는 수비관아에게 공문을 전달하기 위하여 옥녀를 심부름 보냈다. 옥녀는 아흔 아홉 구비나 되는 이곳 고개를 넘어 임무를 마치고 다시 이 고개를 넘어오다가 그만 이곳에서 병들어 죽고 말았다. 이 후 주민들이 꽃다운 나이에 죽은 옥녀가 안타까워 무덤과 사당을 만들어 넋을 위로하는 곳이다. 당시의 길이 얼마나 험준했기에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옥녀를 그렇게 안타까워했을까. 지금까지도 옥녀의 무덤이 잘 보존되고 있는데, 아기를 원하는 부인이라면 누구나 먼저 벌초를 하면 득남을 한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직까지 정월 대보름날에 동제를 올려 옥녀를 기린다고 한다. 아침 7시 20분에 우리는 백암산 입구 초소에서 내리고, 운전을 해준 김사장은 기산리 온다네 농장으로 되돌아간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인지 등산객도 뜸하고 바람은 날카로워 살갗을 엔다. 출발 20분, 백암산 삼거리에 도착한다. 지난달에 내려왔던 우측 정상코스보다는 좌측 백암 폭포 방향으로 코스를 틀고 나니 동해의 일출이 솔숲사이로 눈부시다. 평지성 오르내리막을 거듭하면서 산허리를 돌고 돌아 백암산 출발 50분 만에 백암폭포 앞에 도착한다. 세찬 물줄기 대신에 하얀 얼음덩이가 대신하였다. 어떻게 보면 물보라 같기도 하고 폭포 같기도 하다. 빙폭을 배경으로 플래시를 터트리고 난 뒤 계단을 오르는데 무척 가파르다. 바람소리는 솔가지 끝에서 요란하고 손 끝은 점점 차디차 온다. 8시 25분 쯤 새터바위에 올라 동해의 절경을 감상해도 좋으련만, 날씨가 워낙 춥고 바람이 심하여 그냥 지나친다. 이어 9시에 백암산성 삼거리에 도착하니 정상까지는 1.1km 남았다. 탁 터인 동해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고, 바닷바람과 육지의 바람이 맞부딪쳐 귀가 따갑다. 白巖山城은 신라 때 구대림(丘大林), 황락(黃洛)이란 두 장군이 축조한 石城으로 신라왕이 왜란을 피하여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고 하고, 고려 공민왕도 난을 피해 잠시 피신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해발 670~800m내외의 완만한 지형이어서 성안은 비교적 평지를 이루고 있지만 성 밖의 지형은 가파른 경사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이곳 백암폭포와 연결되는 계곡 이름이 ‘모르시골’이란 것을 보면 왜구가 이곳으로 침입하여 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몰랐다’고 하니 얼마나 한스러우면 ‘모르시골’로 불렀을까. 백암산성을 출발하여 정상으로 향하다 보면 돌무더기의 산성 흔적을 가끔 볼 수 있다. 이 산성은 조선시대에 축조한 고모산성이고, 한글 식 이름으로는 할매산성이라고 하나 보다. 정상 10여분을 남겨 놓고 흰 암석 틈을 비집고 가파른 길을 기어오른다. 우리가 진행할 낙동정맥 코스가 왼쪽 비스듬히 손에 잡히고 칼바람은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차갑게 불어온다. 드디어 9시 30분에 흰 암석을 딛고 1004m의 백암산 정상에 올라선다. 어느 산을 막론하고 정상에 오르면 100번을 올라도 가슴이 벅차온다. 망망 동해가 발아래로 펼쳐지고 산하의 능선이 겹겹이 다가온다. 산맥의 경계는 장엄한데 가야할 길은 천리 같다. 헬기장 귀퉁이에 솟은 정상석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마치고 백암산 정상을 넘어 간다. 비바람 눈보라, 모진 풍파에 견디어온 잡목들이 억세게도 뒤 엉켜 있다. 우리는 몸을 신축하여 좁은 서릿발 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와 백암산 갈림길 정맥코스에 잠시 주저앉아 간식을 취한다. 오전 10시, 이제 서야 낙동정맥 정상코스에 복귀하여 남진을 시작한다. 잔설과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혼재되어 무척 미끄럽고 장딴지는 낙엽 속으로 푹푹 빠진다. 가야할 코스는 창창한데 눈이 덮여 한결 더디다. 전망바위를 지나 한 틈을 내려서니 산중의 비포장 임도를 만난다. 입간판에는 ‘낙동정맥 트래킹 코스’도 안내되어 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다. 953봉을 지나고 잠시 내리막에서 숨을 고르는 듯 했는데, 길은 다시 가플 막을 기어올라 12시에 921m의 봉에 오른다. 오래된 헬기장인데 자세히 보니 서래야의 팻말이 매봉산임을 알린다. 바람도 많이 잦아들고 햇볕도 비교적 따뜻하여 여기서 점심 보자기를 펼친다. 햇반을 뜨겁게 데워서 출발하였는데도 오는 도중에 춥고 얼어서 완전히 氷飯에 되었다. 뜨거운 불을 부어 젓가락으로 휘저은 다음 목 구멍으로 겨우 넘긴다. 이렇게라도 점심을 해결하고 나니 비아의 뜨거운 약차가 그나마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준다. 12시 20분에 매봉산을 출발한 후 다시 20여분 후에 비포장 임도에 닿는다. 여기가 어딜까? 지도를 펼치고 자세히 살펴보니 지도상에 표지된 ‘윗삼승령’이다. 12시 40분, 그러나 ‘윗삼승령’이란 아무런 팻말도 안내판도 없고 좌측 임도에 차단기가 설치된 것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목적지인 ‘아랫삼승령’까지도 1시간 남짓 계산한다. 윗삼승령을 출발하여 다시 30분 정도를 치고 봉우리에 오르니 ‘삼승령’이란 팻말이 있고, 이곳이 또 칠보지맥 분기점이기도 하다. 三僧嶺은 세 명의 스님이 이 고개를 넘어 서울과 영양을 왕래하였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하지만, 굴아우봉 동쪽에 깎아지른 바위 세 개가 멀리서 보면 마치 승려 같다고 해서 삼승령이라 부른다는 이야기이다. 삼승령의 ‘굴 아우봉’ 또는 ‘굴 바위봉’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고개이름을 ‘윗 삼승령’, 아래쪽 남측에 있는 고개를 ‘아랫 삼승령’이라고 한다. 칠보지맥은 ‘굴 바위봉’을 출발하여 잔두목이, 원수목이, 칠보산, 응봉산, 등대산을 거처 동해에서 맥을 내리는 28.2km의 산줄기이다. 또한 이 봉우리는 울진군과 영양군, 영덕군의 경계를 안고 있는 三郡峰이기도 한다. 오후 2시에 오늘의 목적지인 ‘아랫삼승령’에 도착한다. 비포장 임도이고 오래된 亭子 하나가 등산객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는 오른쪽 비포장 임도를 따른다. 30분 후에 저시마을 ‘노인회관’앞에 도착하여 온다네 민박집 김사장에게 전화를 하니 5분도 채 되지 않아 승합차를 대동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곳에서 동네 할아버지(윤씨 할아버지)한 분에게 3년 묵은 고추장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니 3년이 아니고 마침 30년도 더 묶은 고추장이 있단다. 다음 정맥 때에 구해 주겠다는 다짐을 받고 ‘온다네 민박집’에 멈추니 오후 3시가 넘는다. 주인아주머니가 제공하는 커피 잔을 부딪치며 작별을 고하고, 차량 핸들을 영양읍내로 돌린다. 같은 고향의 경북이지만 영양시내를 밟는 것은 처음이다. 자연 그대로의 읍내이고 경북에서도 개발이 더딘 곳 같은 느낌이다. 시내의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한 바퀴를 돌아보고 별 특색 있는 식당도 없는 듯 하여 안동으로 달린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안동 민물요리의 명인 1호 ‘김정순 명가 집’을 찾았다. 안동의 특별 메뉴인 잉어찜을 주문한다. 같은 요리이지만 우선 요리의 명인이라니까 괜스레 기분이 좋아 진다. 맛도 맛이지만 요리는 우선 분위기와 기분이 좌우하는 것을 세삼 느낀다. 세상만사 이와 같이 분위기와 기분이 좌우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다시 해 본다. 서 안동IC를 오후 6시에 통과하여 치악휴게소를 경유할 즈음 흰 눈이 펄펄 날린다. 이어 영동 고속도로에 진입하고부터는 펑펑 하얗게 쏟아진다. 그러나 다행이도 눈은 도로에 닿자마자 금방 녹는다. 그러나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워낙 많이 쏟아지니까 눈은 점점 쌓이기 시작하고, 하남에 들어 설 때는 모든 차량이 거북이 운행이다. 그러나 새로 구입한 볼보 xc90은 밤 10시 40분 쯤에 남부터미널에 도착시킨다. ------------------------------------------------------------------------------------------------- 소수서원 방문기 부길만 1월 17일 낙동정맥 가는 길에 소수서원을 방문했다. 서원에서 어떤 책들을 출판하고 사용했는지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한국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을 방문한다 하여 기대가 컸다. 조선시대 서원은 모두 풍수가 뛰어난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데 소수서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들어가는 정원의 광경부터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진 울창한 숲이 인상적이었다. 서원 주위로는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을 하고 있는 영구봉(靈龜峰)과 길고 넓게 흐르는 죽계천이 있었다. 풍수적으로 보면 소수서원의 지세는 오른쪽으로는 소백산에서 내려온 영구봉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왼쪽으로는 죽계천을 임수(臨水)로 하는 영구하산형(靈龜下山形) 곧, 영험한 거북이가 산에서 내려오는 듯한 형상이라고 한다. 소수서원 정문 바로 앞에는 제사 때 쓸 소의 건강상태를 검사하고 도축하기 위해 따로 칸을 두른 장소가 놓여 있었다. 조선시대 서원에서는 제사와 교육 두 가지가 가장 큰 임무였다. 서원에서는 대개 그 마을이나 국가에서 중요시했던 인물들을 모셔 놓고 있는데, 소수서원은 문성공 안향을 모시었다. 정문과 죽계천의 사이에는 시원한 정자가 있는데, 경렴정(景濂亭)이라는 한문 간판이 보인다. 가운데 ‘렴’ 자는 중국 북송의 유학자 주렴계(周濂溪, 주돈이, <태극도설>의 저자)를 의미한다고 문화 해설사가 들려준다. 말하자면, 주렴계를 경모하면서 지은 정자 이름이다. 이 경렴정에서 유생들이 모여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곤 했다고 한다. 정문으로 들어서니 강의를 하던 강학관은 수리 공사 중이라고 막을 쳐놓아 볼 수 없었고 그 옆의 사당을 둘러보았다. 사당은 강학관과 함께 소수서원의 핵심 공간인데, 정식 이름은 문성공묘이다. 안향의 위패를 모신 곳인데, 문성공이란 안향의 시호 ‘문성’을 높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안향(1243~1306)은 고려의 고위 관료로서 1286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연경에서 처음으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감격한 나머지 그 책을 통째로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도 그려 가지고 돌아와 유학을 연구하였다. 특히, 주자를 숭배하여 그의 초상을 항상 벽에 걸어 두고 보았으며, 그의 학설을 연구하였다. 한국 최초의 주자학자라 할 수 있는 안향은 당시 학교가 날로 쇠퇴해지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장학기금도 마련하는 등 유학 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가 죽은 지 12년 후인 해인 1318년 충숙왕은 그의 공적을 기려 원나라 화가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이 안향의 초상화는 가장 오래된 그림의 하나로 소수서원에 보관되어 있는데, 1962년 12월 국보 111호로 지정되었다. 안향이 죽은 지 이백 년도 훨씬 더 지난 1543년(중종 38년), 주세붕은 평소 자신이 흠모하던 안향의 연고지인 풍기 지역에 군수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안향의 집터에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 선비들의 배움터를 만들었으며, 안향의 영정을 한양의 종가집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봉안하고서 처음으로 이름을 백운동서당이라고 지었다. 1545년 안향의 후손인 안축과 안보의 영정도 함께 배향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위키백과 참조). 백운동(白雲洞)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알려주는 주세붕의 술회가 있다. “하얀 구름이 항상 골짜기에 가득하므로 이곳을 백운동이라고 하였고, 감회에 적어 배회하다가 사당 건립의 뜻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일찍이 주자가 중국에 세운 백록동(白鹿洞)서원에서 따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주세붕이 군수로 부임했을 당시 풍기 지역은 가뭄과 기근이 심하여 극도로 궁핍한 상황이었다. 서원 건립에 대해서도 지역민들의 조소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속에서 주세붕은 기근 극복보다 교화가 더 시급한 문제라고 주장하며 서원 설립을 관철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사립 대학이 탄생한 것이다. 기근 문제보다 교화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현대 언어로 옮기면 경제 성장보다 교육·문화 발전에 힘쓰라는 주장이겠다. 먹거리보다 교육·문화를 중시한 것은 6.25전쟁 때 피난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피난민들은 천막학교를 세웠고, 출판인들은 책을 찍어내어 유통시켰다. 한비야가 세계 재난지역에서 구호사업을 하며 가장 긴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식량 보급보다 난민 교육이었다. 주세붕과 백운동서원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은 사관의 입을 빌어 이렇게 기록한다(중종 36년 5월 22일). “학교를 세워 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하고, 약간의 곡식을 저축하여 밑천은 간직하고 이식[이자]을 받아서, 고을 안의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준수한 자가 모여 먹고 배우게 하였다.” 그리고 실록은 다시 교화를 중요시했던 원님 주세붕의 일화를 들려준다. “형으로서 아우를 송사하여 그 재물을 빼앗으려는 백성이 있었는데, 주세붕이 그 백성을 시켜 제 아우를 업고 종일 뜰을 돌게 하되, 게을러지면 독촉하고 앉으면 꾸짖었다. 몹시 지치게 되었을 때에 그 백성을 불러 묻기를 ‘너는 이 아우가 어려서 업어 기를 때에도 다투어 빼앗을 생각을 가졌었느냐?’ 하니, 그 백성이 크게 깨달아 부끄럽게 여기고 물러갔다.……주세붕이 5년 동안 벼슬을 살았는데, 정사를 행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다 헐뜯고 비웃었으나, 성신(誠信)이 점점 젖어들어서 오래되자 교화되니, 전일 헐뜯고 비웃던 자들이 다 감복하였다.” 백운동서원은 1546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향의 후손 안현의 후원으로 경제적 기반이 확충되고 노비 마련 등 서원 운영에 필요한 제반 방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특히,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을 요청하였다. 사액이란 왕이 직접 서원의 이름을 지어주어 교육기관으로 공인하고 국가가 지원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는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고 있는 시기로 관리는 부패하고 관학이 쇠퇴한 때에서 국가에서도 사립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명종은 기존에 있던 백운동서원에 새로운 이름을 주고 지원을 윤허하였다. 이때 지어진 이름이 바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강학당 안에는 그때 명종이 써준 현판 글씨를 걸어 놓았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을 담은 것이다. 즉, 순흥에서 폐지된 학교를 다시 세워 단절된 도학을 잇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 유래가 슬프다. 1456년(세조 2년) 순흥으로 유배된 세종의 다섯째 아들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의 단종복위 밀모사건으로 인해, 순흥부가 풍기군의 한 면(面)으로 편입, 강등되고 순흥향교가 폐지되었다.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붉게 물들였고 원혼들이 떠돌았다고 문화 해설사가 설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어, 한국 최초의 사립대학 이름이 소수서원이 된 것이다. 때는 1550년 명종 5년이다. 사액서원이 된 후 입학 정원도 10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났는데, 당시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자들이었다. 학문에 뜻이 없고 과거시험에만 한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는 경우 곧바로 퇴원당했다고 한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유생은 4,300명으로 전국 서원에서 가장 많았고, 그 중에는 임진왜란 직전 조선통신사를 지냈고 임란 때 경상우병사로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성일, 선조 때의 좌의정 정탁 등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서원은 마을과 관련된 도학자의 제향과 고등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으며, 동시에 지역 공동체의 중심으로 기능하였다. 후일 서원이 무질서하게 세워지고 부패의 온상이 됨에 따라 대원군 섭정기인 고종 5년(1868) 대다수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소수서원은 문을 닫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였다. 사당을 지나니 바로 장서각이다. 장서각은 오늘날 도서관인데, 책을 찍어낼 목판과 서책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정면 2칸인데 그 규모가 실망스러울 정도로 작았다. 해설사에게 장서 수를 물으니 삼천 권을 보관했다고 한다. 실록을 보면, 임금이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서적을 하사했고, <강목>(綱目)과 <사문유취> 등을 요청하니 주라고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장서각을 지나니 직방재와 일신재가 나온다. 원장, 교수 및 관리를 맡은 유사들의 집무실 겸 숙소였다고 한다. 직방재의 ‘직방(直方)’은 마음과 행실을 곧고 바르게 닦음을 뜻하고, 일신재의 ‘일신(日新)’은 몸과 마음을 나날이 새롭게 함을 뜻하는데, 그 뜻을 모두 <주역>에서 취했다고 한다. 그 옆으로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는데, 학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학생 기숙사에 해당한다. 학구재와 지락재는 직방재, 일산재보다 바닥면의 높이를 낮게, 건물의 규모을 작게 조성하여 건물간의 위계를 나타냈다고 한다. 여기를 지나 사료관을 가니 한국 유학사의 계보를 붙여 놓았는데, 안향을 필두로 하고 있어 새삼 안향의 위상, 소수서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듯했다. 조선이 문치주의의 나라이며 학문을 숭상하는 국민이었고,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의 교육열을 보이고 있는 현상이 바로 여기 소수서원에 그 발단의 일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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