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제7회 낙동정맥 제12~13구간 (박점고개~화매재~황장재~왕거암~주왕산/대전사까지)

2015.03.31 Views 160 산누리

제7회 낙동정맥 제12~13구간 (박점고개~화매재~황장재~먹구등~왕거암~주왕산 학소대~대전사까지)

<첫째 날> 제10구간 (박점고개~화매재~황장재까지)

...............언 제 ; 2015년 3월 14일 (3~11도, 맑음)
...............누구와 : 박종관, 박찬익, 부길만, 이정일, 황성자, @구본영
...............산행시간 ; 총 7시간 (휴식, 식사, 알바 ; 포함)

05;30~06;00 남부터미널~하남 만남의 광장 출발
08;35~09;10 당양휴게소 조식
10;05 삼의 풍경펜션 도착
11;30 삼의임도 ‘차량통행금지 차단기’/대리운전으로 박점고개까지 가려고 했으나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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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12;30 박점고개 도착~출발
12;56~13;00 포도산 분기점/좌
13;20 묘
13;30~14;00 점심
14;02 묘
14;06 송전탑
14;16 묘
14;22 여정봉(630.5m)팻말/삼각점
14;30 낙동정맥 트레일 안내판/이정표/우
14;32 사과나무 과수원/철조망 담장
14;37 시멘트 도로/우측 넓은 밭
14;50 농로/쉼터 의자/허름한 당집/좌측 비포장 임도로 내려가면 지름 길/우리는 직진
15;30 묘3기/좌
15;05~15;15 우측, 포산 마을/하늘아래 첫 동네(해발 약 500m)/개 짖는 소리
15;16 농로 접속
15;19 좌/묘2기
15;25~15;40 Y갈림길에서 휴식/길조심/우
16;29~16;48 화매재/영덕군 지품면 황장리와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를 잇는 2차선 도로
17;22 무명봉
17;50~18;02 시루봉/삼군봉(532m);청송군, 영덕군, 영양군이 겹쳐진 봉
18;11 쉼터/낙동정맥 트레일 안내판
18;55 황장재/황장재 휴게소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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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20;50 진보 ‘오리촌’(청송군 진보면 진보로 102~4 T.054-874-7119)저녁식사
21;30 풍경펜션 입실(영양군 석보면 삼의리 174-5 T.054-682-3633)/대리운전

<산행기>................................................................

새벽 5시 30분, 車庫 문을 열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비아는 뒤 트렁크에 있는 짐부터 먼저 옮겨 달란다. 부랴부랴 짐(간식거리, 도시락 등)을 옮기려고 트렁크 안에 있는 박스를 드는데 이 외로 무거워 주춤한다. 이때 트렁크 문짝이 살짝 내려오면서 이마와 ‘꽝’ 맛 부딪치는데 정신이 아찔하다. 눈 깜짝할 사이이다. 순간적으로 열을 받은 나는 ‘무슨 간식을 이렇게 많이 샀느냐’고 한 마디 하니까 비아는 평소와는 다르게 무척 싸늘하다. 무슨 일이 있나? 알고 보니 위경련에 몸살까지 겹쳐 아침식사도 하지 못하고 겨우 참여하였단다. 아뿔싸!

남부터미널을 출발하여 6시에 하남 만남의 광장을 경유하고, 중부고속도로를 거쳐 감곡IC로 빠진 뒤 단양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어제 중동부지방에 폭설이 내렸다는데 이곳 제천, 단양 근처 산골짜기에도 잔설이 꽤 많아 보인다. 그러나 地熱이 따뜻하고 포근하여 거의 녹고 오늘의 기온도 10도 이상 오른다니 모처럼 상쾌한 산행에 기대를 모아 본다.

찬님의 찬찬한 운전은 단양휴게소부터 삼의 ‘풍경펜션’까지이고, 여기서부터는 대기하고 있던 대리기사 신정한씨에게 핸들을 넘긴다. 오전 10시를 갓 넘겨 비포장 길 박점고개에 진입하여 5분정도 오르는데 산불 방지기간이어서 차량 ‘입산금지 차단기’가 내려져 있다. 마침 신정한씨가 차단기 키를 관리하다가 옆 집 동료에게 보관시켰다고 하여 차량을 되돌린다. 일단은 안심을 하고 그와의 연락을 시도한다. 그러나 전화가 두절되어 그의 집까지 왔다 갔다 하였으나 결국은 허탕만 치고 1시간 30분간이란 시간만 소비한 꼴이 되었다.

다시 삼의 ‘입산금지 차단기’ 앞으로 되돌아 왔을 땐 11시 30분, 배낭을 지고 낙동정맥 정규 코스도 아닌 비포장도로를 굽이굽이 걸어 오르는데, 무슨 큰 손해라도 본 것 같아 더욱 지겹고 시간도 아깝다. 올라가는데 꼭 한 시간이 걸린다.

박점고개에 도착하니 12시 30분, 지금부터 정규 정맥길인 완만한 코스를 따라 오른다. 나무바가지를 만들어 팔았다는 뜻을 가진 박점재는 영양의 박점마을과 영해의 속곡리를 잇는 비포장 임도이다. 온화한 봄기운에 박점재를 출발하여 20분도 되지 않아 재킷을 벗어 배낭에 넣는다. 인간은 계절의 변화에도 무매한가보다. 우리들은 아직 겨울 옷차림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양지쪽 산수유는 어느새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바람은 솔솔 봄 내음을 실어 나른다.

오후 1시에 690m의 葡萄山 분기점에 오른다. 748m의 포도산 정상은 오른쪽으로 약 800m 떨어져 있지만, 정맥길은 좌측으로 살짝 비켜 나간다. 이 산에 산머루가 얼마나 생산되기에 산 이름을 한자명의 포도산으로 부를까. 지명과 연관성을 생각하다보니 삼의계곡에 있는 블루베리 쉼터의 ‘블루베리’와 포도, 산머루는 그 모태가 같은 걸까. 라는 생각도 해 본다.

오후 1시 30분에 햇볕이 따스한 양지바른 능선에서 점심을 하는데, 정작 도시락을 정성스럽게 준비한 비아는 전혀 먹지 못하고 다른 대원들만 먹는다. ‘저렇게 먹지도 못하고 이번 산행을 끝까지 해 낼 수 있을까.’ 대원들 모두가 적잖게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는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줄까봐서 인지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척 애쓴다.

평탄한 내리막성 능선길을 우측으로 휘어 630.5m의 여정봉에 올랐다가 다시 우측으로 내려선다. 낙동정맥 트레일 안내판이 나타나고 이어서 사과밭 철조망을 따른다. 그리고는 시멘트 포장길을 들 쑥 날 쑥 하며 오후 2시 50분에 이른다. 비포장 임도 변에 쉼터 의자가 있고, 이 능성이 왼쪽에 함석판 지붕으로 만든 작은 집이 있다. 무슨 창고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중에 독립 화장실을 만들어 놓기도 만무이다. 호기심 많은 비아가 직접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고 난 후에야 당집으로 추정할 뿐이다.

오후 3시를 넘기면서 오른쪽으로 하늘아래 첫 동내 쯤 되는 해발 500m 고지에 포산마을이 지척으로 보인다. 개 짖는 소리가 한가롭게 들리는 것이 정겹기도 하다. 이 마을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한 번쯤 보고 싶기도 하지만 시간상 그러하지 못하여 아쉽다. 그러나 오전에 신정한 대리기사님이 일러준 얘기를 떠 오른다. `이 고장엔 날씨가 가물면 포산마을이요, 장마 때는 계곡의 삼의 마을`이란다. 계곡이라고 해도 물이 잘 빠지고, 높은 고지에 살아도 물 걱정 없다는, 살기 좋은 곳이란다.

가족 묘 옆과 농로를 두서너 번이나 들락날락하며 영덕군 지품면 황장리와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를 잇는 2차선 고개인 ‘화매재’에 도착하니 오후 4시 30분이 넘는다.

이곳 화매재에서 긴 고민에 빠진다. 황장재 까지는 아직 1시간 30분은 걸릴 텐 데 무엇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비아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마무리하면 내일과 그 다음 달 코스에 많은 차질이 생기고......

이를 눈치 챈 비아는 ‘가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라며 무거운 발걸음을 뗀다. 묵 밭 사과 농장을 지나 무명봉에 오르니 5시 20분, 조망은 볼 겨를도 없이 늦은 오후로 빠져든다. 날씨도 점점 차가워지고 바람도 거칠어 마음이 조급해 진다. 버럭도사와 만님이 번갈아가며 비아 앞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후미를 지키지만, 우리 앞을 가로 막는 532m의 시루봉은 절벽에 부딪친 것 처럼 높아 아득하기만 하다. 마지막 힘을 다 쏟아 부어야 한다.

오후 6시에 시루봉 정상에 선다. 먼데서 보았을 때도 뾰족하게 솟아오른 산 모양이 마치 시루를 연상하게 하는 봉우리이다. 그러나 시루봉이란 표시는 한 마디 없고 준.희의 팻말에는 ‘삼군봉’으로 되어있다. 청송군, 영덕군, 영양군이 겹쳐진 봉우리란 뜻이다. 차고 거친 바람을 피해 물 한 모금으로 마지막 갈증을 해소하며 7시를 바라본다.

오후 7시, 황장재 아스팔트길에 점점 어둠이 내려앉는다. 그러나 황장재로 안내하는 낙동정맥 이정표는 정상 능선이 아니고 오른쪽으로 300m정도 떨어진 곳으로 유도 되었다. 대리기사 신정한씨를 호출하여 승차한 다음에 그는 그의 집과 가까운 곳에서 하차시키고, 우린 진보로 달린다. 수소문하여 맛있는 유명 식당을 찾은 곳이 ‘오리촌’이다. 오리 주물럭 구이도 구이지만, 특히 청국장과 된장이 제 맛이다. 주인아주머니의 친절과 캄보디아 서빙 아가씨의 호의에 즐거운 식사를 끝내고, 석보면 삼의리에 있는 ‘풍경펜션’에 입실하니 저녁 9시 30분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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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제11구간 (황장재~먹구등~왕거암/시산제~주왕산 용연폭포~주왕산 학소대~대전사까지)

...............언 제 ; 2015년 3월 15일 (3~11도, 맑음)
...............누구와 : 박종관, 박찬익, 부길만, 이정일, 황성자, @구본영
...............산행시간 ; 총 11시간 (낙동정맥 5시간 4분+시산제 1시간 15분+왕거암~대전사 4시간 41분)


04;20~06;15 풍경펜션 기상~출발/주인 사위가 대리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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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0 황장재 출발
07;27 갈평재/나무의자/표지판(먹구등 6.8km)
07;52 무명봉/표지판(먹구등 5.8km, 황장재 3.1km)
08;05 표지판(먹구등 5.2km, 황장재 3.7km)
08;29~08;38 묘2기/휴식
08;48 주왕산국립공원(출입금지)안내판
08;58~09;00 대둔산(905m)갈림길/경주최씨 묘/좌측
09;49 732.6봉/삼각점
10;00 통천문(바위)
10;28~10;40 기사리-너구동 고개/표지판(먹구등 0.7km, 내기사저수지)
10;52 이정표(먹구등 0.1km, 내기사저수지 2.1km)
10;58~11;02 먹구등(846.4m), 폐 시멘트헬기장/명동재 1.5km방향/좌
11;39~11;41 NO.2/명동재(표시없음)/폐헬기장/이정표(먹구동 1.5km, 느지미재 1.4km)
12;02~12;11 느지미재/우측은 내원동-용연폭포-학소대-대전사 방향/통행금지구역
12;44 왕거암 갈림길/이정표(왕거암 0.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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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6~14;12 왕거암(907.4m)/폐헬기장/삼각점/주왕산 최고봉/시산제 및 점심
14;20 이정표(가메봉 1.4km, 왕거암 1.4km)
14;30 이정표(가메봉 1.8km, 왕거암 0.8km)
14;38 이정표(가메봉 0.6km, 왕거암 1.2km)/묘
14;45 가메봉삼거리/이정표(용연폭포 3.9km, 대전사 7.3km, 가메봉 0.2km)
15;01 이정표(대전사 7.0km, 용연폭포 3.8km)
15;12 나무테크 다리/이정표(용연폭포 3.0km)
15;21 이정표(용연폭포 2.6km, 대전사 6.0km, 가메봉 1.5km)
15;27 나무테크 다리
15;29 나무테크 다리/우측-탐방로 아님
15;30 큰골/이정표(용연폭포 2.2km, 가메봉 1.9km)
15;40 나무테크 다리
15;45~15;55 폐 내원마을 터-나무테크 다리-갈대 숲
15;59 나무테크 다리
16;05 웅덩이에서 황소개구리 울음-철다리
16;12~16;28 산불감시초소/구름다리/용연폭포
16;35 후리메기 입구-나무다리
16;45~16;53 학소대
17;05 자하교 화장실/주왕암 300m입구 갈림길
17;25 아들바위-기암교 화장실/이정표(주왕산 2km, 용연폭포 3.1km)
17;30 대전사
17;40 대전사 입구 주차장/산행종료

<산행기>

새벽 4시 10분에 알람 벨이 울렸는데도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니 4시 30분이 되어서야 기상한다. 70대 중반을 넘긴 주인댁 부부는 대구에서 사업을 하다가 연세 들어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다보니 이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단다. 6시 15분에 산뜻한 냉이 된장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주인 댁 사위께 운전을 부탁하여 풍경펜션을 출발, 황장재에 도착하니 6시 35분이다.

황장고개에 이는 새벽바람은 예상보다 싸늘하다. ‘원래 해뜨기 직전이 가장 차갑고 해가 뜨고 나면 날씨가 좋을 것’이라며 대원들을 다독이는 찬님!, 아침식사도 하지 못하고 컨디션이 걱정되는 비아의 심정을 안정이라도 시키기 위함일까. 소공원에 있는 ‘지품면 황장재’라고 음각된 표지석을 배경으로 단체 셔터를 누르고, 6시 40분에 정규 코스를 출발한다.

해발 405m 황장재는 영덕군 지품면과 청송군 진보면을 잇는 34번 국도이지만, 조선시대에는 知品院이 있었던 곳으로 영덕군의 중심지였다. 황장목이 유명했으며 안동의 간고등어를 탄생시킨 유래 깊은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황장목보다는 복사꽃이 유명하여 영덕으로 넘어가는 도로변을 따라 파란 보리 싹이 함께 어우러지는 4월에는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그런데 산불방지기간이어서 입산 통제를 알리는 입간판 옆으로 슬쩍 월경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 펴지 못하고 당당하지도 못하여 숨 막히게 봉우리를 향해 올라가는데 나뭇가지 사이에서 일출이 시작된다. 경쟁이나 하듯이 카메라 셔터를 터뜨리고 나니 햇살이 방긋이 다가온다. 이런 관경은 누구나 느껴보지 못하고 또한 새벽등산이 아니고서는 맛보지 못한다.

그럭저럭 봉우리 하나를 넘어 코스를 다시 낮추니 ‘갈평재’란 첫 이정표가 나타난다. 지품면 갈평동과 진보면 학곡동을 잇는 고개인데 먹구등까지는 6.8km 이다. 오늘은 먹구등을 넘어 왕거암에서 시산제를 올릴 예정이다. 이젠 탈출로도 없고 되돌아 갈수도 없는 첩첩 산중에서 산짐승 울음이 가까이에서 들려온다. 어미 앓은 고라니 일까, 노루 일까.

대원들 서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무명봉을 넘고, 먹구등 5.8km 이정표와 5.2km의 표지판을 차례로 지난다. 8시 48분에 주왕산국립공원 출입금지구역임을 알리는 입간판을 넘고 보니 ‘고래 등 같다’라는 얘기가 떠오른다. 산이 크고 유명세를 타다 보니 능선이 넓고 웅장하여 고래 등을 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대둔산 정상을 불과 100m를 앞두고 정맥코스는 ‘경주최씨 묘’에서 좌측으로 비켜 내려선다.

大遯山은 해발 905m이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솔괭이로 먹을 만들어 나라에 납품하였다고 한다. 전남 해남의 大屯山(671m)과 충남 금산-전북 완주 경계의 大芚山(878m), 모두들 이름이 같다. 그러나 이곳 대둔산이 제일 높은 산이고, 한자 이름은 각각 다르다. 이곳 능선길엔 무슨 동네라도 있었던 것처럼 평지를 이루고 돌담 흔적도 눈에 띤다. 특히 드툼하게 쌓인 낙엽 속에는 얼음이 녹지 않아 자칫하면 미끄러지고 넘어지기 일수 이다.

실제 동네가 있었다면 당시에는 피난처였든가 아니면 선사들이 살았음직도 하다. 낙엽송 군락 길에 732.6봉을 지나고 10시에 돌 아치로 된 통천문을 빠져 나오니 간간히 암벽사이길이 이어진다. 버럭도사와 만님은 일찌감치 먹구등으로 도망가고, 나는 중간을 보는데 찬님이 비아와의 거리를 좁혔다 널렸다 조정하며 잘 배려하고 있어 다행이다.

10시 30분에 기사리와 너구동을 있는 고개에 도착한다. 먹구등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했는데 먹구등 700m를 남겨두고 氣盡脈盡, 에너지 보충을 위하여 10분간이나 휴식을 취한다.

대둔산 아래 기사동은 신라 말기에 많은 벼슬아치들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隱居하였다고 해서 棄仕洞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其思里로 바꾸어 부른다. 어떤이는 이곳을 ‘두고개’라고도 하는 데 이정표에 ‘두고개’라는 이름이 표기되지 않았다.

10시 40분에 이 고개를 출발하여 먹구등 0.1km 이정표를 지나 11시 정각에 846.4m의 먹구등 정상에 올랐으나 폐헬기장이고 보잘 것도 없다. 초입부터 먹구등에 오르면 뭔가 후련한 전망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러하지 못하여 실망(?)곧바로 명동재 방향을 길을 잡는다.

먹구등에는 평평한 암반이 있었는데 이 암반에서 발을 구르면 소리가 난다고 해서 원래는‘벽구등’이라고 불렀다. 또한 농악놀이의 한 악기인 ‘벗구’처럼 생겼다고 해서 벽구등이라고 부르든 것을 지금은 먹구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11시에 먹구등을 출발하여 40분쯤 되었을까. 높낮이도 불분명한 비슷비슷한 능선길에 ‘NO.2’라고만 적힌 코팅지가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이정표 한 곳에는 먹구등 1.5km, 느지미재 1.4km라고 표시된 폐헬기장에 서게 된다. 이곳이 명동재인듯 싶은데 명동재란 표식이 없어 황당하다.

명동이란 영양 풍력발전단지의 쪽의 명동산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건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철거됐지만 주왕산아래에 있는 내원마을 사람들이 영덕 지품면으로 숯을 팔려 다녔던 길이였다고 전해지는 고개이다.

등산을 할 때 같은 동료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힘들어 하면 다 같이 전염되어 모두가 힘들다. 그 중에서도 네 끼니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孤軍奮鬪하는 비아는 후미에서 두 번이나 토했다고 털어 놓는다. 그렇다고 이곳에서는 탈출로도 없다. 오로지 왕거암까지 가서 시산제를 올리고 보자면서 느지미재에 이르니 웬 까마귀 떼가 꽥꽥거리며 하늘을 날고 있다. 일본에서는 까마귀가 吉鳥라고 했으니까 경망스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좋은 쪽으로 생각을 전환해본다.

느지미재에서 왕거암 갈림길까지는 1.0km이다. 지금 시간은 12시 11분, 약 30분 정도 소요될 것으로 계산하고 가파른 비탈길을 치고 오르는데 숨이 목에 닿는다. 중간 쯤 오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비아도 묵묵히 따르고 있어 무척 다행이다.

‘느지미재’는 주왕산 아래 내원동 사람들이 영덕 지품면에 있는 장을 보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한다. 아침 일찍 가서 돌아 올 때는 날이 저물어 느지막하게 돌아온다는 뜻이다.

11시 40분이 조금 넘어 왕거암 갈림길에 도착한다. 그간 고생한 代價라도 보상하려는 듯 화창한 햇볕아래 탁 트인 경관, 단숨에 보상받은 느낌이다. 왕거암은 여기서 오른쪽으로 300m를 더 가야 한다. 찬님과 나는 먼저 가서 현수막을 걸고 祭需를 차리기로 하고 오후 1시쯤에 오늘의 목적지인 왕거암에 도착한다.

王居岩은 周王山 산줄기 중에서 제일 높은 907.4m의 봉우리이다. 周王이 거처했었다는 전설이 있다. 널찍한 봉우리에 잡목 틈으로 바위하나만 덩그렇다.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나 할까. 이 바위를 중심으로 ‘2015년 낙동정맥 시산제’ 현수막을 고정하고, 祭需와 배낭을 진열하고 보니 조촐하지만 그런대로 형식이 갖추어 진 모양이다. 무고산행을 기원하는 찬님의 낭랑한 祝文소리는 주왕산 산줄기를 타고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빈 잔에 성심으로 술을 따르고 音響을 청하니 해맑은 햇살이 산천에 가득하다. 이렇게 始山祭를 정성껏 올리고 난 후에 점심식사를 하는데, 어! 山神靈님의 돌보심인가. 비아가 점심식사를 하기 시작한다. 千萬多幸이다.

가메봉 0.2km를 남겨둔 가메봉 사거리 갈림길이다. 대원들 모두가 초행길이니 선뜻 누가 나서서 빠른 길을 잡기도 애매하고, 숙의 끝에 전망 좋고 이름 익숙한 대전사 쪽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이제 비아가 선두에 선다. 내리막길은 지루하고 지겹도록 이어진다. 3시 30분에 ‘큰골’에 내려서니 Y자 계곡이 나타나고 오른쪽은 ‘출입통제’길이다. 아마 이 오른쪽으로 이어진 길이 느지미재와 연결된 길이 아닐까.

그리고는 평지이다. 집터 흔적 같기도 하고 寺址같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테크로 된 다리를 몇 개를 지나 3시 40분 쯤 되니까 돌담만 앙상한 내원마을 터에 다다른다. 내원마을은 전기 없는 오지의 청정마을로 산 꾼들의 사랑을 받았던 마을이다. 그러나 주방천의 수질오염과 환경저해정비의 일환으로 국립공원에서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2005년에 5가구, 2007년에 마지막 3가구가 철거되어 지금은 동네의 흔적만 남기고, 넓은 묵밭에 마른 잡초만 무성하다.

내원마을은 임진왜란 때 아랫동네주민들이 계곡상류로 피난 오면서 마을을 형성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목탄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주로 거주하였다.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80여 가구에 500여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살았으며, 1970년 3월 2일에는 주왕산초등학교 내원분교까지 개교되어 7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나 그 후 주민들의 離農이 점점 많아져 1980년 3월1일 폐교되었다. 마을 터를 벗어나자마자 황금빛 갈대 군락이 펼쳐지고 우린 갈대숲에 숨어 카메라 셔터를 터트린다.

주방천 계곡물이 유리알처럼 빛나고 수양버들이 약간의 연두색으로 옮겨 타는 새 봄이다. 인적도 드문 길을 혼자 선두에서 열심히 길을 재촉할 때이다. 우수경칩도 지난 만물은 잠에서 깨어났음인가. 길 가 웅덩이에서는 개구리 떼의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신기하기도 하고 정겨워 가까이에서 들어보려고 다가서니 울음을 딱 그친다. 그리고 누른 배를 하늘로 뒤집어쓰고는 죽은 듯이 눕는다. 올챙이 알을 놓는 중인가. 배가 누렇고 붉은 색을 띤 것을 보면 늘 보든 토종 개구리보다는 큰 것 같아 이 개구리도 외래종인가?

오후 4시쯤에 백학과 청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鶴巢臺를 지난다. 천근만근이든 몸이 갑자기 생기가 돈다. 기기묘묘한 기암절벽과 주상절리가 앞으로 넘어질듯 하면서 정렬되어 있고, 서로가 부딪칠 듯 하면서 조화를 이룬다. 중국의 장가게나 황산에 뒤쳐지지 않는다. 周王山이 원래는 石屛山이었다는 데 학소대를 보고 이름 지은 것은 아닐까. 그러나 중국의 진나라 주왕이 이곳까지 피신하여 숨어 살면서 산 이름까지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전망 의자에서 후미를 기다린다. 비아는 아프다. 아프다 하면서도 학소대에 와서는 아픔도 잊었는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무슨 말을 붙이려고 해도 평소와는 너무 다르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컨디션을 물어보니 이번에는 신장 쪽을 걱정한다. 위장에서 방광, 신장? 아직 대전사까지는 2km 남짓 남았는데.........

오후 5시를 넘어 자하교를 거친다. 이어 아들바위와 기암교를 건너고 보니 요즘 KBS드라마 징비록의 인물 중 한 분의 詩碑가 눈길을 끈다. 임진왜란 때 일본 침입이 없을 것으로 임금에게 보고했던 정치인 학봉 金誠一(1538~1593)이다. 그가 남긴 “주왕전의 옛터에서”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한 편의 문장으로 남겼다.

披草尋行闕(피초심행궐) 숲을 헤치며 주왕궁궐 찾노라니
山椒落日低(산초낙일저) 산마루 지는 해는 낮게 드리웠네,
階平已無級(계평이무급) 계단은 무너져 층계는 없어졌고
瓦解半成泥(와해반성니) 기와는 부서져 반 진흙이 되었네,
制陋非堯殿(제루비요전) 규모는 초라하여 요전보다 못하지만
林深是鳥栖(임심시조서) 숲은 깊어 산새들 서식지가 되었네,
興亡千古恨(흥망천년한) 흥하고 망하고 천고의 한을 품고
長嘯過溪西(장소과계서) 길게 휘파람 불며 계곡 서쪽을 지나가네.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끌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 大典寺에 내려선다. 大典寺는 672년(신라 문무왕 12) 의상(義湘)이 세웠다는 설과 919년(고려 태조 2)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대전사에서 6~7분 거리에 있는 주차장에 가까스로 이르니 오후 5시 40분이다. 오늘 산행은 시산제시간까지 합하여 총 11시간이다.

운전을 부탁했던 풍경펜션 사위가 반갑게 맞는다. 그는 우리를 진보 갈림길에 있는 농협까지 픽업하고는 기다리던 아내와 함께 그의 승용차로 바꿔 탄다. 모두가 고맙다. 특히 개인보다도 팀을 배려하는 여왕벌다운 심성에 더욱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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