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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회] 마이산 2009년 첫 산행기
2009.01.03 Views 31 이정일
[마이산(馬耳山)] 2009年(己丑)元旦, 첫 산행기
7;00 서울 합정역 출발 / 11;00 함미산성 / 12;40 광대봉 입구 / 14;20 비룡대 / 15;30
탑사 / 17;30 북부 주차장 도착
새해 첫 번째 산행 때는 대부분의 산 꾼들이 名山 중에서도 名山을 찾아 그해의 無事 安全山行을 祈願하는 것이 보통이다.
올해도 우리 한국출판인산악회는 己丑年 새해의 첫 산행으로 그 많은 명산 중에서도 가장 祈禱발이 세고(?) 意味 있는 馬耳山을 선택한 것은 그만한 理由가 있어서일까. 아무래도 세계적인 金融危機에 銳敏해진 우리 출판인들의 士氣振作은 물론, 회원 상호간의 親睦과 건강을 더욱 增進하면서, 우리산악회의 發展과 無事安全을 祈願하기 위함이리라.
朝鮮을 개국한 李成桂도 대망의 큰 꿈을 품고, 이곳 마이산에서 致誠으로 祈禱를 하여 靈驗을 얻었는가 하면, 銀水寺에 머물던 處士 李甲龍 옹도 壬午軍亂이 일어나자 나라가 어지럽고 전봉준이 처형당하는 등 민심마저 흉흉할 때, 그는 국태민안의 일념으로 祈禱로서 탑을 쌓아 佛事를 일으킨 곳이 바로 마이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개인적으로도 꼭 한번 다녀오고 싶었던 산인 터라, 이번 산행을 마이(my)산행의 기회로 삼고는, 다른 모든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고 새벽 택시에 올랐다.
이른 아침 7시 합정역, 이병덕 대장은 속속 도착한 21명의 회원들에게 김밥 한 줄씩을 점심으로 배당하고는 어김없이 定時에 출발한다. 그리고는 안성휴게소에서 국밥으로 朝食을 하고, 鎭安 톨게이트에 進入할 때는 10시쯤 되었을까. 나는 차창 밖 우측으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예사롭지 않은 산봉우리 두개에 視線을 멈춘다. 순간 ‘아, 저 산이 바로 昇天을 시도하여 하늘로 솟아오르다가 그 꿈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전설의 주인공 馬耳山이구나’ 라고 直感한다. 지금까지 그 많은 산들을 찾아 다녔지만, 이와 같은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아닌가. 슬슬 호기심이 발동하며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신라, 백제가 아귀다툼을 하던 戰場도 세월이 흐르면서 城壁은 무너지고, 이제는 흔적뿐인 돌 틈 사이로 등산객들만 넘나들며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거나 그때의 역사를 알려고 하는 이도 별로 없을 듯하다. 그래도 이곳을 ‘수꾸머리’라고 부르는 것은,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 ‘守軍址’란 글자에서 나온 地名이라고 생각한다면 한번쯤은 그때의 역사를 聯想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출발 15분 만에 능선 안부에 올라섰는데, 따뜻한 날씨라고는 하나 山頂의 바람은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다. 여기에다 음지쪽으로는 눈이 살짝 덮여 있는 데다 路面까지 얼어붙어서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조건도 아니다. 어느새 許공주는 아이젠(eisen)과 스페츠(spats)까지 착용하고 빙판과 눈길 사이를 겁도 없이 앞선다.
해발 500m를 전후한 능선길에 탁 트인 展望! 여기에다 오늘은 그런대로 날씨까지 받쳐주는 셈이다. 그만그만한 봉우리 몇 개를 오르내리면서 진행하다보니 군데군데 솟아 오른 전망대를 연이어 만나게 된다. 이런 멋진 전망대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을 듯, 아무래도 절경마다 휴식을 취하다보면 예정된 산행시간 내에 목적지까지 도착하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사부작사부작 낮 12시 반이 가까울 무렵에야 광대봉 입구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등산객들의 便宜施設을 위한 공사를 하느라고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하는 수 없이 오른쪽으로 트래버스(traverse)하여 안부에 올라서니, 천하일경의 전망봉인 삿갓바위가 아닌가. 이곳에서 조망하는 絶景에 모두들 도취하여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분주하다. 仙景이 따로 있는 걸까. 오른쪽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보흥사의 朗朗한 讀經소리도 絶景과 어울러져 韻致를 더해준다.
마지막 後尾에는 오늘 산행에 처음 나온 최명애 대원이 선두를 따라잡기에는 벅차다는 전갈이 온다. 홍사룡, 허진 사장 외 6명의 대원이 그와 함께 동행을 자청하며 30분 후에 도착하는데, 처음산행이어서 그런지 많이 힘들어 한다. 그런대도 선두 그룹에서는 後尾 동료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이 도착하여 숨도 채 고르기 전에 선두팀에서는 눈길 내리막 능선 길을 줄달음치고는, 그만그만한 봉우리를 다시 오르 내리다가 陽地바르고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튼다.
그래도 산 꾼들만의 끈끈한 義理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걸까, 후미 대원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인원 점검을 마치고 난 다음에야 옹기종기 둘러 앉아 점심으로 배당받은 김밥을 먹는다. 그리고는 잠시 悠悠自適의 시간을 갖는가 했는데, 이번에는 임요병 대원이 선두에 나서면서 출발을 유도한다. 어차피 등산을 왔으면 예정된 코스를 서둘러야 어둡기 전에 上京한다는 것이다.
동북향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산줄기를 가리키며, 저 산은 덕유산이며 白頭大幹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호남평야, 남쪽으로는 호남정맥, 북쪽으로는 운장산,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금남정맥의 중심지인 태극지점까지 가리킨다. 역시 우리들도 백두대간을 한 두 번씩이나 완주한 기억을 더듬어 보며,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또한 그는 이곳 鎭安 출신 유명 인사들의 자랑도 늘어놓으며, 우리 일행들의 목적지인 북부주차장 쪽으로 가는 길 안내까지 친절히 일러준다. 그러나 사실 길 안내는 이미 이병덕 대장이 현지 여성등산객 2명을 섭외(?)를 해놓은 상태였다. 우리들은 이 여성의 안내를 받으며 봉두봉을 지나고 암마이산 옆 능선을 내려가면서, 자연이 준 기이한 巖峰과 절경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발길이 늦어지고 있다.
이 巖峰은 암 마이봉(673m)과 숫 마이봉(667m)으로 이루어져 있는, 즉 陰陽을 갖춘 유일한 夫婦峰이며, 우리나라 명승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치 거대한 시멘트를 조합하여 쌓아올려 만든 것처럼 솟아 있고, 자갈까지 섞여 있는 침식상태 그대로이다. 실제로 마이산은 백악기의 巒巖이 침식을 받아 두 봉우리가 이루어진 것으로서 표면에는 풍화혈(tafoni)이 발달하고 있다고 한다. 나무는 별로 많이 자라지는 않고 있으나, 군데군데 관목과 침엽수가 보일뿐이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경계를 이루는 이곳, 마이산이란 이름은 조선 太宗 13년에 명명하였는데, 太祖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까지는 束金山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남쪽으로는 纖塵江水界의 시작이 되고, 북쪽으로는 금강수계가 발원하는 이곳을 신라 때는 서쪽의 많은 산중에서 제일 아름답게 솟아 있는 산이라고 하여 ‘서다-솟다-섯다’의 西多山, 고려 때는 용이 하늘로 솟아 오를듯한 기상을 가졌다하여 龍出山이라 불렀는데, ‘서다’와 `龍出`은 같은 의미를 가진 표기로서 이두식으로 ‘섯다(西多)’이고, 한문식으로는 ‘용출(龍出)’이라고 한다.
계절에 따라서도 문장가들에 의해 그 이름도 각양각색으로 불린다. 봄에는 멀리서 바라볼 때 파릇파릇한 새싹 사이로 돛대를 띄어 놓은 것처럼 보여서 인지 돛대봉이라 하고, 여름에는 수목 사이로 드러난 봉우리가 龍의 뿔처럼 생겼다고 하여 龍角峰, 가을 단풍철에는 말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馬耳山, 겨울철에는 눈이 와도 이곳에는 눈이 쌓이지 않고 먹물을 찍어 세워 놓은 붓을 닮았다고 해서 文筆峰으로도 불린 것일까.
이제 탑사까지도 불과 10여분 후면 도착할 것 같은데, 이송이씨라는 분은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오페라 하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알바위 암벽 루트가 있는데, 국내 암벽마니아들에게 최고의 인기라고 자랑한다. 어떻게 생겼으면 오페라 하우스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하며,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해보고도 싶다. 그러나 시간상 그러하지 못하여 아쉬움으로 하고, 오후 3시 30분에 탑사에 들어선다.
이곳의 탑들은 조선후기 임실출신의 李甲龍이라는 사람이 25세 때(1885년) 銀水寺에서 솔잎으로 生食을 하며 수도정진 하던 중, 꿈에서 衆生을 구원하라는 神의 계시를 받아 탑을 쌓았다고 한다. 그는 粗衣惡食을 하며 낮에 돌을 날라다가 밤에 쌓았는데, 돌을 쌓는 데에도 天地陰陽의 이치와 八陣圖法 적용하였기 때문에 천재지변에도 잘 허물어지지 않는 단다. 실제로 백여년 동안이나 온갖 풍상을 겪어 오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많은 탑들이 존재한 것으로 봐서 시제말로 ‘무척 과학적이었나 보다.’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탑사 내에는 섬진강 발원지의 샘물이 쫄쫄, 오가는 이의 목을 축이도록 축조되어 있기도 하다.
그는 儒佛禪에 바탕을 둔 龍華世界를 실현하기 위해서 일까. 아니면 衆生을 求道하기 위해서 일까. 조선 太宗의 둘째 아드님인 孝寧大君의 16대 손으로 태어나 16세 때 부모를 여의고,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후 속세를 떠나 전국을 만행하다가 마음을 정한 곳이 바로 이곳 마이산이라고 한다.
남자산이라고 하는 지리산에서 200리 길, 여자산이라고 하는 계룡산에서 200리 길, 그 중간에 위치한 마이산령 夫婦봉우리에 입지를 정한 그는 苦行을 자처하며 疊疊山中, 오직 산 하나로만 대화를 하고, 수도에 정진하면서 30년간 108기의 탑을 쌓아 108번뇌의 해탈을 염원했음인가.
천지탑, 일광탑, 월광탑, 약사탑, 중앙탑, 월궁탑, 용궁탑, 신장탑 등 이름만 들어도 우리 범인들로서는 경이롭고 신비로울 뿐이다. 그가 95세에 사망하여, 관을 짜고 장례를 치룰려고 하는데, 사망 하루 반(36시간)만에 죽음 날짜를 잘못 선택했다고 하여 다시 살아나서, 2년 후인 97세에 스스로 수명이 다가옴을 알고 1년간이나 용궁의 물만 마시며 단식으로 살다가 98세에 눈을 감았다고 하니, 불국토에서는 실제로 이런 초인이 있는 걸까.
태양도 어느덧 서산으로 기울고, 만불석탑 위에서 흘러나오는 확성기에서는 저녁 염불소리가 낭랑하게 돌탑 사이를 휘감는다.
관광객들도 이제 뿔뿔이 제 갈길을 찾고 있다.
마이산아 夫婦山아
하늘에 오르지 못한 애절한 사연
천지탑에 가슴가슴 괴었는가
天上天下 못다한 사랑의 영원한 化身이여!
용담호 天池를 치솟는 龍馬의 기상은
山中의 靈山이라. 조선 개국의
胎夢을 품었으니 신비로다.
생명의 石間水는 갈한 영혼의 목축이러니
청정수맥의 금강, 섬진강을 거느렸다
온갖 시름 정갈하게 돌탑을 쌓아
한 개 두 개 올려놓은 저들의 소망을 받드는가
구구구 산비둘기 탑사 층계를 오른다.
아! 하늘문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을.
저녁노을이 드리워진 탑사를 막 벗어나려는데, 입구 화강암 石柱에 세겨저 있는 `허호석`의 ‘馬耳山’앞에 한 번 더 걸음을 멈추었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銀水寺로 향한다. 탑사에서 불과 15~6분 정도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마이산봉우리 바로 밑둥치에 위치한 은수사이다.
銀水寺는 태조 이성계와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로서 이곳의 물이 銀같이 맑고 투명하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란다. 원래는 상원사였으나 그 이름도 역시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를 하던 중 仙人이 현몽에서 金尺(군왕의 상징이며, 모든 제도의 표준)을 주면서 ‘삼현 강토를 헤아리도록 하라’라고 한 뒤 조선을 세웠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특히 은수사에는 사찰에서 보기 드문 태극전이 있는데, 태극전은 태조 이성계가 천명을 받고 山神祭를 올리는 祭壇이다. 원래는 ‘정명암’이었는데 정명암이란 음양오행의 순환에서 ‘태극’이 그 상징이 되는 곳이다. 태극전 안에는 이성계가 기도 중에 받았다던 금척의 모조품이 진열되어 있고, 이성계가 仙人으로부터 金尺度를 받는 장면의 說話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銀水寺 대적광전 앞에는 국내에서 제일 큰 북(法鼓)이 있는데, 이 안내판에는 ‘자기야 말로 자신이 진실의 주인이고, 자기야말로 자신을 의지할 곳 (自修自行, 自心不亂)’이란 글귀와 북 치는 요령이 적혀 있다. 누구든 세 번을 쳐서 자기의 자신을 일깨워 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도 북채를 잡고 북 중앙을 세 번씩 세 번을 힘껏 두드려 본다. 둥, 둥, 둥...... 그 첫 번째 打鼓는 글귀에 적힌 그대로 나를 일깨워 보기 위해서이다. 나의 주인은 내 자신이고, 내가 의지 할 곳도 내 자신이라는 의미를 되새기며, 두 번째 법고를 두드린다. 한국출판인산악회의 발전과 無事山行을 소망하는 내 마음이다. 마지막 세 번째의 打鼓는 전 출판인의 경기진작과 건강증진으로 가정의 행복을 나름대로 기원하여 본다.
요즈음은 해가 떨어지고 나면 금방 어두워지기 때문에 갈길을 서둘러야 한다.. 이성계가 씨앗을 심었다던 천년기념물 386호의 ‘청실배나무’도 먼 발치에서만 바라보고, 天皇門으로 향해 부지런히 발길을 옮긴다. 은수사 뒤편으로 나있는 계단을 밟고 양 봉우리 사이를 10여분정도 올라오면 말이 천황문이지 은수사와 북부주차장을 잇는 고개에 위치한 자그마한 쉼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고개를 중심으로 빗물은 남북으로 갈라서면서 섬진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만든다고 하니 또한 예사 고개는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여기서 華嚴窟을 보기 위하여 더 올라 갈 생각이었는데, 안내를 맡아주신 두 여성분이 무척 지루한 표정이다. 이를 먼저 눈치 챈 진학범 사장은 그들을 놓칠세라 얼른 다가가서 다독거린다. 천황문에서 숫 마이봉으로 100여m쯤 올라가면 화엄굴이 있는데, 이 굴속에 떨어진 石間水를 마시고 치성을 드리면 옥동자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란다. 그러나 요즈음은 비둘기들의 서식지로 물이 오염되어 있어 마실 수가 없다고 하니, 안타깝지만 우리들은 두 안내원(?)을 따라 내리막 나무계단을 밟으며 20여분정도 걸었을까, 오늘의 목적지인 북부주차장에 도착한다.
그릇에 떠 놓은 정화수의 물이 하늘로 치솟는다고 하는 역 고드름, 산봉우리 중턱에 군데군데 파먹은 듯이 패여서 굴처럼 보이는 타포니 현상, 숫 마이봉에 위치한 화엄굴의 石間水, 이러한 不可思議한 현상들을 손으로 만져보고 가까이에서 확인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날씨도 이제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성급한 대원들은 벌써 미리 예약해 둔 鎭安의 향토 음식 ‘애저식당’에다 자리를 잡는다.
새해 첫 산행 뒤의 뒤풀이 시간이 그만큼 기다려졌음일까.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德談을 나누는 자리이다. 더구나 오늘은 진안이 아니면 먹어볼 수 없는 낭랑한 애저요리가 새해 첫 산행 뒤의 만찬분위기를 띄워가고 있지 않은가. 몇 순배의 건배가 잦아지고 채호기 시인의 `명태잡이`가 가락을 타면서, 어둠속의 馬耳山은 점점 傳說속으로 빠저드는듯 하다.
東으로 달리던 天馬는 이미 지쳤는가.
갈 길은 아직 먼데 그만 쓰러지고 말았구나.
戀人이 몸통만 가져가고 두 귀는 남겼는가.
두 봉우리를 이루고 하늘로 솟아있네.
원래 마이산은 高麗 말 때, 이성계가 전라도 운봉전투에서 賊將 ‘아지발도’를 무찌르고 凱旋하던 도중, 마침 이곳을 지나면서 당시의 龍出峰을 보고는 그 모양이 마치 자신이 祈禱 중에 仙人으로부터 받은 金尺을 모아 묶어서 세운 것과 같다고 하여 束金山으로 부르고, 이렇게 詩 한수를 남겼다고 한다. 그 후 태종이 先祖들께 省墓를 하기 위하여 이 地方에 왔다가 멀리서 束金山을 바라보니 마치 말의 귀를 닮은 모양이라고 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 오늘의 馬耳山이다.
산행일 ; 2009년 1월 3일
동행인 ; 김유영, 김현호, 김형재, 김호중, 박찬익, 신형건, 이동준, 이병덕, 이석희 이정일, 임요병, 임춘환, 정민영, 조은상, 진학범, 채호기, 천승배, 최면애, 허영심, 허 진, 홍사룡, 이송이 외 1명 총 23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