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항엔 거북선이 있었다
2014년 5월 17일 낙남정맥 종주를 마쳤다. 뿌듯하다. 9개월 동안 아홉 차례, 17일간 하루에 보통 8시간 산행했으니, 합치면 130시간이 넘는다. 경남 하동군에서 김해시까지 수백㎞를 산을 타고 넘었다. 저녁에 하산 후 인근의 봉하 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하고 다음날 통영을 가기로 했다. 오랜 시간 산을 다녔으니 인근의 바다를 보기로 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 8시 30분 통영의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바로 옆에 거북선 전시장이 있어 먼저 들렸다. 최근에 만든 모형이지만 임진왜란 당시의 실물과 같은 거북선 안으로 들어가니 마치 조선시대에 온 듯하였다. 배의 내부는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위층에는 노,총통 등이 놓여 있었다. 총통은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하여 화살이나 탄환을 발사하는 무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식당, 군인 대기실, 환자실 등 다양한 용도의 공간들이 있는데, 그 곳에 당시 군인들의 모습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현재 거북선이 이처럼 재현되어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 사용되었던 거북선의 정확한 모습은 아직까지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2층 거북선을 구경했지만, 3층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거북선이 2층 구조이면, 노와 총통(포)이 2층에 함께 놓여 있게 되는데,이 경우 노를 젓는 것과 포 쏘는 것을 동시에 빨리 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다시 말해 기동력과 전투력,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거북선은 기동력과 공격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 꾼을 2층에, 포를 3층에 놓아 전투함의 효율성을 극대화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김정진·남경완, <거북선 신화에서 역사로>).
역사 기록을 보니, 이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3척이 만들어져 활동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 많은 해전에서 승리하는데 겨우 3척이었다니……. 당시 조선의 주력 전투함은 거북선이 아니라 판옥선이었다. 거북선은 단지 돌격선 또는 지휘선의 역할을 담당했다. 거북선의 모습은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이충무공 행록>에 잘 나와 있다.
“크기는 판옥선만 하지만 위를 판자로 덮었다.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하였다. 나머지 부분에는 모두 칼과 송곳 같은 것을 꽂아서 사람들이 발 디딜 곳이 없도록 했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붙였으며 그 입은 총구멍이 되었다. 뒤는 거북의 꼬리처럼 되어 있었는데, 그 꼬리 아래에도 총구멍이 있었고, 좌우로 각각 여섯 개의 총 구멍이 나 있었다. 그 모양이 대체로 거북의 모습과 같았기 때문에 이름을 거북선이라고 하였다.”
거북선은 일본 배보다 육중하고 단단했지만, 속도는 느렸다. 일본 배는 속도가 빨랐지만, 가볍고 얇았다. 그래서 조선 군인은 거북선으로 적의 배에 돌진하여 박살내는 작전을 썼다. 반면에, 일본 군인은 오랫동안 내전을 겪은 터라 칼싸움에 능했기 때문에, 속도가 빠른 배로 재빨리 상대방 배에 접근하고 올라타서 백병전을 벌여,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조선 군인들을 제압하는 전술을 썼다. 거북선의 갑판 위에 꽂은 송곳이나 칼은 이러한 일본 군인들의 침투를 막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선두에 섰을 뿐, 주력 전투함으로 활용되지 못하여 3척만 만든 것이다.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더 중요한 무기는 총통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본군의 유력한 무기가 조총이었다면, 조선 수군의 유력한 무기는 총통 곧 화약을 이용한 대포였다. 일본 조총은 당시 최신 무기였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 큰 위력을 발휘했다.빗발같이 날아오는 조총 사격으로 이순신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은 적이 있다. 이때 이순신은 내색 않고 지휘하다가 전투 후 탄환을 빼냈다고 한다. 그러나 총통은 사정거리가 최대 500m로 조총보다 더 길고 파괴력이 컸기 때문에, 해전에서 매우 유리했다. 총통은 그 이름이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으로 불렸는데, 천자문 순서에 따라 크기를 정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거북선은 이미 1410년대(태종 시기)에 왜구를 격퇴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1592년 임진왜란에 등장했던 거북선은 이순신이 예전의 거북선을 군관 나대용을 시켜 개량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이미 예고되고 있었지만, 무능한 왕과 썩은 관료들은 대비책을 세우기는커녕 당리당략에 빠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유성룡은 하급 무관이었던 권율과 이순신을 육군과 해군의 장수로 추천하였다. 전라 좌수사에 임명된 이순신은 일본군과의 해전에 대비하여 바다의 지형지물을 세밀히 관찰하고 일본 전투함을 부술 수 있는 거북선을 개발하여 건조한 것이다. 우리는 거북선 내부를 관찰하며 당시의 전쟁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전시된 거북선 입구에는 한산대첩 등 임진왜란 당시의 해전 그림이 커다랗게 보였다. 상세한 설명도 나와 있어 역사 교육의 장소로도 좋을 것 같았다.
거북선 전시장을 나와 중앙시장으로 가니 활어 가게들이 많았는데 규모는 마산 어시장보다 작았다. 시장 바깥쪽에는 노숙자나 가난한 노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걸린 현수막을 보니,통영시중앙동자원봉사회, 중앙동주민자치위원회, 중앙동주민센터, 통영등대로타리클럽 등에서 주관하는 행사 같았다. 아울러 “사랑, 정성보다 더 향긋한 조미료는 없다!!”라는 현수막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시장 바로 옆에는 ‘멍게빵’을 파는 상점이 있었다. 점원은 다 익은 빵을 꺼내며 우리 일행에게 시식을 권했다. 맛이 독특했다. “왜 멍게빵인가요?” “멍게 껍질에서 식이섬유를 추출해서 가루로 만들어 빵의 반죽에 섞어 구워낸 거예요.” 특허도 땄다고 한다. 멍게 빵을 한 아름 사들고 ‘한려 수도 조망 케이블카’로 향했다.
♥미륵산 케이블카
도착하니, 케이블카 타려는 관광객들로 크게 붐비었다. 요금은 9천 원. 케이블카로 미륵산 정상 입구까지 올라가는 시간은 10분 정도인데,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린 다음에야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산 가운데 위치한 케이블카를 2~3분 정도 타고 올라가니 남해안 일대가 발 아래로 주욱 내려다보인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다음, 미륵산 정상을 도보로 올라 갔다 오니 20분 정도 걸렸다. 중간 중간에서 바라보는 남해안의 모습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미륵산 정상가는 길에는 당포해전전망대, 한산대첩전망대 등이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해안가 모습은 또 달랐다. 가까이에서 보면 오로지 드넓은 바다이지만, 이렇게 멀리 산 위에서 바라보니 넓었다 좁아졌다 하는 구불구불 골목길 같았다. 남해안이 일본군의 눈에는 끝없는 바닷길이었겠지만 이순신 장군에게는 한 눈에 잡히는 골목길이었을 테니, 효과적인 군사 작전이 가능해서 크게 승리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미륵산에서 조망하는 남해안은 역사와의 대화 장소인 듯하다.
♥방언 연구가 김성재 선생님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를 내려오니 방언 연구가 김성재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김 선생님은30여 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최근 그만두고 방언 연구에만 몰두하고 계신 분이다. 통영에서 경상도 방언을 중심으로 시작한 김 선생님의 연구는 전라도와 충청도 그리고 한반도 전체의 방언으로 그 대상이 확장되었다고 한다. 김 선생님의 안내로 정원이 아름다운 고급 한식집에서 ‘멍게 비빔밥’을 먹으며 방언에 관하여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얘기를 들으며 국어 교과서와 사전에 나와 있는 방언의 쓰임새나 설명에서 숱한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현대에 사용하지 않아 ‘고어’라고 하는 어휘들이 사실은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현재에도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방언을 죽은 언어 취급해 버리니 아름답고 풍부한 우리말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도 잘못 알려진 방언은 실로 많다고 한다. 다행히, 김 선생님이 방언과 북한어와 관련된 국어 교과서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 대사전의 오류를 수정하는 작업을 계속 해옴으로써 많은 성과를 낸 바 있다. 또한, 그 동안의 연구를 종합하여<방언 속에 내 고향 있었네>(박이정출판사 발행)를 펴냈다. 김 선생님은 교과서와 사전의 오류를 끈질기게 지적하건만, 전공 학자들의 고집과 학계의 벽에 막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 길을 열어준 것이 바로 그 분의 저서 출판이었다. 문화 창조라는 출판 행위의 소중한 역할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바로 그 귀한 역할을 수행한 저자와 출판인(박이정출판사 박찬익 대표)과 함께 앉아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으니 참으로 뜻 깊은 자리였다.
“우리 민족이 살아온 유구한 역사와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방언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민족 최고의 문화유산이다.”이렇게 주장하는 김 선생님은 방언에 문화재의 개념을 도입하여 ‘국보급 방언’의 어원 풀이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국보급 방언’이란 한반도의 절반이 넘는 지역에서 수천 년 동안 사용되어 온 순우리말로서 표준말과 어맥이 다른 방언을 뜻한다. 이와 비교하여 사용 범위가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고 표준말과 어맥이 같은 방언은 지방 문화재급 방언이라고 부른다. 들을수록 흥미 있는 방언 이야기였다.
김 선생님은 다음 연구 대상으로 바다 방언을 꼽았다. 바다 방언이란 바다에 사는 여러 가지 생물의 이름, 어로 도구, 바다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종류의 파도나 바람, 조수 등을 비롯한 자연 현상에 대한 방언을 말한다. 강원도에서 통영까지 바다 방언이 어떤 맥을 이루고 있는지 연구하여 책으로 펴내고 싶다고 한다. 식사 후 인사하고 나오는데, 김 선생님은 우리 일행 모두에게 통영의 멸치 한 상자씩을 선물로 안겨준다. 무언가 거꾸로 된 느낌이다. 방언의 소중함을 배우고 점심을 얻어먹고 선물까지 받아들었으니……. 이 지면을 통해서 다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