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 점심 식사 후 충렬사로 향했다. 통영 충렬사는 이순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충렬사는 1606년(선조 39년) 왕의 명령에 따라 통제사 이운용이 창건하였다. 1663년(현종 4년) 임금이 직접 이름을 지어준 사액(賜額)사당이 되었다. 그 후 역대의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 가을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왔다.
그런데, 충렬사 창건 연대가 1606년이니 이순신의 전사 후 8년이나 지난 때이다. 이유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당시 임금인 선조는 이순신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반면에, 뚜렷한 성과도 없는 명나라 장수들에 대해서는 그 공훈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오히려 명나라 장수들이 이순신 표창을 요청했으나, 선조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노량해전 관음포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시신을 땅에 묻지도 못했다. 이순신의 시신이 선영(先塋)이 있는 아산에 왔을 때 선조는 중국 명나라 수군 도독 등자룡의 장례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이순신의 시신은 땅에 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한마디에 이순신의 시신은 또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먼 남쪽으로 내려가 고금도의 묘당도(廟堂島)에 두 달 동안 가매장되었다. 이 사실을 들은 민중들은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머물렀던 곳곳에 초가 사당을 지어, 이순신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쪽바다에 이순신의 사당이 많다고 한다(이종락, <이순신의 끝없는 죽음>).
결국, 서울로 옮겨온 등자룡 시신에 대한 극진한 장례가 끝난 다음에야 이순신의 시신을 소달구지에 실어서 아산으로 옮겨가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도 선조가 명량해전 및 노량해전의 공적을 일체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국가가 사당을 세워주기는커녕 두 해전의 대첩을 기리는 이순신의 공적비조차 세울 수 없었다.
왜적의 간계를 간파하여, 출전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한 죄목으로, 이순신은 옥에 갇혔고, 그 대신 원균이 거느린 수군이 전쟁에 나가 크게 참패하였다.명량해전은 바로 이때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배도, 군사도, 무기도 변변치 않던 최악의 조건에서 크게 승리한 전투이다. 심지어, 선조는 명량해전 직전에 “배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므로 수군을 폐지하니 육군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순신은 이 명령에 다시금 불복한다.
“신에게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사력을 다하여 싸우면 왜적이 바다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전쟁 후 속이 좁은 선조는 명령 불복종으로 이순신을 벌 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명량해전의 승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명량해전에 나서기 전 이순신은, 감옥에서 극심한 고문을 당하여 죽기 직전에 판중추부사 정탁의 청원으로 겨우 풀려난 후여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이 무렵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를 보면, “곽란이 심해져 일어나 움직이지 못했다”, “통증이 심해져 배타는 것을 포기했다”, “복통을 앓았다”, “식은 땀이 온 몸을 적셨다” 등 아픔을 호소하는 내용이 많다.
전쟁 초기 탄환이 어깨에 박혔어도 끄덕없던 이순신의 몸이 고문으로 극도로 쇠약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셋째 아들이 전사하고, 어머니가 옥고 중에 사망한 일 등으로 불효를 자책하며 무척 괴로워했다. 이순신의 이러한 인간적 고뇌는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 처절할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반면에, 이순신은 전쟁에 나설 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요, 최고의 전략가요, 부하들과 늘 격의 없이 소통했던 지도자였다.
이런 이순신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충렬사 사당 중앙에 놓인 이순신의 영정을 보니, 단아한 인상이 들어온다. 이 영정은 정형모 화백이 1978년에 그린 것이다. 현재 이순신의 정확한 용모는 밝혀진 것이 없다. 세종로의 큰칼 찬 위엄 있는 모습도 장군의 전모는 아닐 것 같다. 이순신의 모습을 잘 아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아담하여 마치 수양하며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 내면으로는 담대한 기운이 있었다.”
사당 내부의 좌우에는 팔사병풍이 둘러쳐져 있었다. 이 팔사병풍은 명나라 황제가 이순신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보낸 선물을 그린 것이다. 이 외에도 학익진을 펴고 있는 조선 수군의 모습을 그린 그림, 이순신의 친필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이충무공전서>도 소장되어 있다. <이충무공전서>는 정조가 이순신을 흠모하여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 일기, 한시, 관련 기록 등 이순신에 관한 모든 것을 집대성해 놓은 것이다. 이 책은 2007년 비봉출판사에서<충무공 이순신 전서>라는 제목으로 한글 번역본을 출간하여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세병관
충렬사를 나와 근처에 있는 세병관으로 갔다. 세병관은 임진왜란 때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수군을 효과적으로 지휘·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삼도수군통제영의 객사(客舍)이다. 객사란 조선시대 각 고을에 둔 관사(官舍)인데, 이곳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기 때문에, 관찰사가 일을 보는 동헌보다 격이 높았다고 한다.
통제영의 최고 지휘관은 삼도 수군통제사인데, 이순신이 바로 초대 통제사인 것이다. 전쟁 후 이곳저곳 옮겨 다니던 통제영은 1604년 이후 제6대 통제사 이경준에 의하여 통영에 자리 잡게 되었다. 통영이란 도시 이름도 통제영에서 나온 것이다.
1605년 완공된 세병관은 180평의 대지 위에 50개의 굵은 기둥으로 세워진 웅장한 건물이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인데 모든 칸에 창호나 벽체가 없이 통칸으로 시원하게 열려 있다. 현판의 세병관(洗兵舘) 글씨도 큼지막하고 시원하다. 세병관의 ‘세병’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安得壯士挽天河 淨洗甲兵長不用(안득장사만천하 정세갑병장불용) 어떻게 힘센 장사를 구하여 은하수를 끌어당기어,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 길이 쓰지 않게 할 수 있으려나. “은하수를 끌어와 전쟁으로 피묻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니, 전란의 참화를 직접 겪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평화를 향한 강렬한 염원이 진하게 느껴진다. 오늘날로 치면 해군 총사령부의 현판이 이처럼 아름다운 시귀에서 나왔으니, 당시 우리 선조들의 평화 애호정신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세병관의 건립은 단지 군사적 목적이나 전략적 기능만이 아니라, 조선 수군의 승리를 내외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기념비적 사업이기도 했다고 한다. 즉, 승전의 기념비로서 위엄 있는 해군 지휘본부를 건설하는 것이 세병관 건립의 중요한 배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세병관이 일제강점기에는 벽체를 만들어 초등학교로 사용되었었다. 현재의 세병관은 그 초등학교를 다시 없애고 복원한 것이다.
세병관 현판의 의미대로 전쟁을 종식시키려면 제도를 개혁하고 국력을 키워야 했지만, 당시 조선 정부는 그러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유성룡이 영의정이 되어, 양반도 세금을 내고 유능한 노비 출신에게도 벼슬을 주는 등 제도 개혁을 단행하는 듯했지만, 얼마 안 가 다른 관료들의 반대를 빌미로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도 않은 1598년에 유성룡은 선조에 의하여 파직되고, 모든 개혁은 물거품이 되었다. 게다가 인조 때에 어리석은 외교정책까지 더해져, 종전 30년도 채 되기 전에 터진 정묘호란(1627년)에 이어, 병자호란(1636년)까지 겪었으니, 세병관의 의미가 부끄럽다.
양대 호란이 끝난 1646년 세병관의 정문을 세우고 지과문(止戈門)이라고 이름 붙였다. 가운데 솟을대문을 달고 양 옆으로 출입문을 두었다. 지과문의 ‘지과’역시 “창을 거둔다”라는 뜻이니, ‘세병’과 마찬가지로 남쪽과 북쪽의 모든 외적들로부터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염원이 깃든 현판이겠다.
세병관을 나와 간 곳은 동피랑 벽화마을이었다. ‘동피랑’은 ‘동쪽 비탈’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은 구불구불 좁은 골목길을 따라 가파른 언덕 위로 주욱 올라가면 맨 꼭대기 평평한 땅에 통제영의 동포루(東砲樓)가 있다. 올라가는 길 아래로 아름다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데, 그보다는 담벼락마다 그려진 총천연색 벽화가 더 눈길을 끈다. 벽화마을이 시작되는 초입에 작곡가 윤이상의 커다란 초상화가 인상적이다. 그러고 보니 윤이상의 고향이 바로 통영이다. 통영이 예술의 도시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동피랑 벽화마을의 조성도 예술을 사랑하는 통영 시민들이 이루어냈다. 철거 위기에 놓인 달동네가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지금은 백과사전에까지 나와 있다.
“통영시는 낙후된 마을을 철거하여 동포루를 복원하고 주변에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그러자2007년 10월 ‘푸른통영21’이라는 시민단체가 공공미술의 기치를 들고 ‘동피랑 색칠하기-전국벽화공모전’을 열었고, 전국 미술대학 재학생과 개인 등 18개 팀이 낡은 담벼락에 벽화를 그렸다.그러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마을을 보존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어 통영시는 마침내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마을 꼭대기의 집 3채만을 헐고 마을 철거방침을 철회하였다. 철거 대상이었던 동네는 벽화로 인하여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통영의 새로운 명소로 변모한 것이다.”(두산백과)
♥ 우와! 몬당서 채리보이 토영항 갱치가 참말로 쥑이네
동피랑 벽화는 화가들이 때때로 그림을 바꾼다고 하니, 우리 같은 외지의 관광객들은 여러 번 가보아도 좋겠다. 실제 동피랑 마을을 찾아가니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아기자기하며 예쁜 벽화들이 골목마다 넘쳐나고 있었다. 더욱이 아래로는 강구안 포구의 드넓은 바다가 이러한 벽화들을 받쳐주고 있어 예술미와 서정성을 한껏 부풀게 한다.
그뿐 아니라, 벽화가 크기 때문에 담벼락 가운데 서 있게 되면, 또 다른 존재가 된 듯 한 기분에 젖는다. 환상적인 동화 속의 황홀한 주인공으로 변신하거나, 사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는 나그네가 되기도 한다. 또는 고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어린아이가 되는가 하면, 요정 같은 미녀와 입 맞추는 청년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세계의 존재가 되어 바다 속에서 나와 하늘로 날아오르는 신화 속 새의 날개를 붙잡아 보기도 하고, 저 세상에 계신 작곡가 윤이상 선생님과 바로 옆에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더운 5월에 이 벽화마을 꼭대기를 올라가며 핥아먹는 아이스크림의 맛은 정말 달달하였다. 꼭대기에서 복원된 동포루를 구경하고 아까와 다른 골목길로 들어서면 또 다른 벽화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벽화와 함께 파아란 하늘과 바다를 즐기며 언덕 중턱에 도착하니, 전시물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가까이 가 보니, 아기자기하고 예쁜 삽화와 함께 통영 방언들이 적혀 있었다.
“무십아라! 사진기 매고 오모 다가, 와 넘우집 밴소깐꺼지 디리대고 그라노? 내사 마. 여름내도록 할딱 벗고 살다가 요새는 사진기 무섭아서 껍닥도 몬벗고, 고마 덥어 죽는줄 알았능기라.” [무서워라, 사진기 매고 오면 다예요? 왜 남의 집 변소까지 들여다보고 그래요? 나는 여름내 옷을 벗고 살다가 사진기 무서워서 옷도 못 벗고 그냥 더워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중앙시장서 폴딱거리는 괴기로 회도 떠 묵고, 써언한 매운탕에 밥도 마이 무-서 배도 부린께 다리품을 팔아감서로 여, 저, 댕기보거로!” [중앙시장에서 싱싱한 고기로 회도 먹고, 시원한 매운탕에 밥도 많이 먹고 배도 부르니 다리품을 팔아가면서 여기 저기 다녀보게] “우와, 몬당서 채리보이 토영항 갱치가 참말로 쥑이네” [와~ 언덕에서 바라보니 통영항 경치가 정말 그만이네] “속이 재리서 문디가 될라카다가도 저게, 뻥 뚤핀 강구안을 채리보모 분이 써언하이 가라앉고 그라는기라.그라이께 오곰재이 오글티리고 살아도 내구석이 좋은기라.” [속이 상해서 문드러지다가도 저기, 뻥 뚫린 강구안(통영항)을 보면 화가 시원하게 가라앉고 그러지. 그러니까 다리를 오므릴 정도의 작은 방이라도 내가 사는 이곳이 좋은거야]
읽고 있으니 통영 사투리가 더 정겨워진다. 담벼락을 수놓은 예쁘고 아기자기한 그림들, 언덕에서 바라보는 바다 절경, 벽화마을을 만들어 철거 대상 동네를 구해낸 통영 예술인들의 의지, 정감 넘치는 경상도 사투리 등등, 여러 아름다운 요소들이 합쳐져 동피랑 벽화마을이 성립되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일행도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세계를 체험했다는 뿌듯함을 안고 동피랑 벽화마을을 내려왔다.
예술의 도시 통영에는 김춘수 생가,청마(유치환)문학관, 박경리 기념관, 윤이상 기념관(도천테마공원) 등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으나, 아쉽게도 하루 일정을 마쳐야 했다. 그리고 바로 아래의 “중앙시장서 폴딱거리는 괴기로 회 떠 묵고” “오곰재이 오글티리고 살아도 내구석이 좋은”각자의 보금자리로 가기 위해 저녁 8시 30분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